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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27일 토요일

나의 이야기--- 대등한 인간관계에 대한 생각

10월달은 참 많은 경조사를 다녀왔다. 정말 일주일 간격으로 결혼식과 장례식을 다녀왔는데 매번 이런 경조사를 보며 느끼지만 참으로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느낀다. 다른 한편으론 사람 사이에는 대등한 인간관계란 없다는걸 알아간다.
그동안 서로 친하게 관계를 유지해 왔으므로 서로 대등한 관계에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만일 스스로 대등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철부지 생각일 뿐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내가 주는 것은 크고 남이 주는 것은 작다란 인식이 밑바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본적인 인식은 항상 내가 준 것보다 받은 것이 적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친구나 가족이 어려운 일에 닥치면,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웃긴 얘기지만 돈 문제만큼은 어떤 면에서는 모든 것 초월하기도 하는 것이 사람이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한두 번은 그간의 정 때문에 도와주게 된다. 하지만 여러 번 반복되고 도움에 대한 반대급부를 받지 못할 상황에 놓이면 선뜻 마음이 끌리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자기가 믿고 의지했던 친구란 존재와 사람의 정이 얼마나 얄팍한 것인지 절박한 상황에 처하면 알 수 있게 된다.

이런한 비근한 예는 상가 집에 가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 죽어 문상 온 사람들을 보고 그 사람의 생전의 삶에 대해 평가를 하곤 하지만, 그 역시 중요한 것은 아닐 게다.
잘사는 집에서 상(喪) 이 나면 조화가 문밖까지 넘쳐나고 손님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지만, 반대로 가난한 집의 상(喪) 은 한산할 정도로 사람이 없는 것이 세상인심이란 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일 것이다. 여기에 내가 그동안 인간관계를 어떻게 쌓아 왔는냐는 따로 말을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어쨌던 우리는 친구나 형제자매나 동료는 늘 대등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평소에는 어느 정도 서로를 인정하고 관계를 유지하지만 돈 문제만 생기면 얼굴을 붉히게 된다.천편일률적 (千篇一律的) 으로 균등하게 나누어 부과해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거나 정말 돈이 없어서 내지 못하는 사람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면 돈이 없어서 내지 못하는 사람은 자존심으로 상처를 입고, 돈을 내기 싫은 사람은, 이를 핑계로 삼아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고 실리를 탐하게 된다.

이처럼 주변 환경이 엇비슷하여 대등한 인간관계를 유지할 것 같지만, 세상에 똑같은 사람이 존재할 수 없듯이, 생활의 차이에서 오는 격차가 엄연히 존재하는 한 지난(至難)한 일이다.
서로 처지가 비슷한 사람끼리 서로 등을 기대며 산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일에 있어서 똑같은 존재로 대등한 삶을 대접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서로서로 조금씩 자신이 가진 것들을 나누고 양보하고 살아야, 최소한 스스로 만큼은 따뜻한 정을 느끼고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2012년 10월 24일 수요일

아르헨티나 이야기---게시판을 보면서 나도 한마디..

대부분의 지나간 것에는 아쉬움이 더해져 슬프고 그리운 기억으로 남는다.. 그래 딱 거기까지라면 좋겠다. 애증 이상의 어떤 마음도 생기지 않는 그 끝을 넘지를 말아야 하는것은 사람에 대한 예의이고, 이제는 온전치 못한 형태로만 남은 기억에 대한 예의이다. 

안정에 대한 열망 혹은 누군가 안아주지도, 자신도 자신을 품지 못함에서 오는 외로움을 무기로 어느날 태연하게 불쑥 찾아와 불을 지르듯 절망을 안겨주고 사라지는건 어른이 아니다. 

남은 사람은 그 불이 꺼지고 그을음이 남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며 견디어 내다가 미움조차 사라질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아닌 것, 그것은 당신이 두려워하는 외로움보다도 더 무서운 일이다. 그러니 행여나 다음번에는 무거운 짐은 내려놓는 대신 고운 꽃이라도 주고 가시라..





나의 이야기---뭐 그런 기분..


뭐 그런기분..

아주 훌륭한 음식이 앞에 놓였는데 내 주변에 아무도 없을때, 
못 먹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좋아하지도 않는 음식이라 
먹어도 안먹어도 그만이면서도 왠지 먹어야 손해보지 않는 ,
아니 먹어야 내 소임을 다하는 것 같은 어정정한 기분으로 
보이지 않는 것에 등떠밀리듯 먹고나서 문제가 생겼을 경우, 
사실 결과적으로 내가 먹고 싶어서 먹은것인데 
"도대체 왜 이렇게 되버린거지" 후회하면서 화나는
"그때 분위기 때문에 이렇게 된거다" 라고 발뺌하는 나를 본다.

이미 음식은 나의 식도로 통하는 목구멍을 질러 아래로 내려간지 오래라 
무를 수도 없어서 남 탓도 못하고 내 탓을 하면서도 억울한 그런 감정들... 
명확한 것 없이 항상 그런식으로 선택을 하며 그렇게 어중간하게 살아온건 아닌가 싶어서
갑자기 혼자 주절주절, 궁시렁궁시렁 투덜된다.
요즘의 기분, 매사가 다 그랬던 것 같은데 그래도 일, 사랑은 제외렷다..


지은이 : 아르헨20년

나와 같이 공감하시는 분이 계실까???





2012년 10월 22일 월요일

아르헨티나 이야기---포플리즘의 문제점

몇일간 어머니날(10월 셋째주 일요일) 관계로 포스팅을 못했네요..ㅎㅎ
뭐 대목 사라진지는 이미 예견 하고 있었지만 해가 갈수록 더욱 하락세를 걷고 있는듯 합니다. 우리 한인들의 사업인 옷가게 뿐만 아니라, 여러상점 및 레스토랑도 마찬가지로 이번 어머니날은 기대이하 였다고 합니다. 과다한 경쟁과, 선물품목의 다양성과, 특히 현 아르헨티나의 경기상황이 눈에 띄게 안좋다는것을 보여준 한주간이였습니다. 불과 3~4년전까지만 해도 나름 저축도 하고 장사하는 맛이 났는데 지금의 아르헨티나는 왜 이모양으로 됬을까요? 그것에 대한 의문과 답은 바로 포플리즘에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럼 이 포플리즘 정책이 무엇인가에 대해 잠깐 알려드리고 계속이어 나가겠습니다.

◈ 나라 거덜내는 포플리즘(Populism) 

포플리즘이란 대중주의 라고도 불립니다. 또는 인기영합주의, 대중영합주의와 같은 뜻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일반 사람들이 보기에는 포플리즘 정책은 서민들을 위한 보건과 복지 수많은 사회혁신, 저소득층과 중산층 모두 잘사는 나라를  기대하지만 이곳 아르헨티나에서는 단순히 정치인들의 장난과 혜택 받지 못하는 허상에 불과 합니다. 일반 대중을 정치 전면에 내세우고 동원시켜 권력을 유지하는 정치체제를 말하는데 엘리트 주의와 대립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 각 사전과 사람들의 해석하기에 따라 약간 다른 의견이 있을수 있으나, 캠브리지 사전에선 " 보통 사람들의 의견을 반영하려는 정치사상과 활동" 이란 의견도 있습니다.
포플리즘의  한국번역을 하자면 민중주의 또는 인기 영합주의라고 해서는 포플리즘의 실체와 내용을 잘 이해하가 어렵습니다.

수많은 중진국 나라에서 지난 100년 동안 여러 나라(아르헨티나, 브라질, 체코, 포르투갈등)들이 중진국에서 주저앉고, 선진국으로 진입을 모두 실패 했습니다. 
한때 선진국의 로망이였던 아르헨티나..
20세기초 세계를 이끌 절호의 기회를 잡고서도 근 반세기 몰락을 거듭한 아르헨티나는 포플리즘에 의한 대표적인 국가 경영의 실패에 관한 교훈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쇠락했을까요? 그것은 과도한 복지와 포플리즘, 실패한 산업정책이 우선 꼽힙니다. 이 포플리즘 정책은 아르헨티나에선 페론이즘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페론주의는 아르헨티나 경제의 미래에 대한 올바른 비전을 갖추지 못했고, 경제 정책적 실천수단에 대한 고려도 부족했었습니다. 그 막대한 현금을 믿고 페론은 정치적 실책과 포플리즘 영합주의로 인해 국고를 탕진하면서 동시에 정치적 몰락과 살인적인 인플레션을 몰고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치욕스럽게도 아르헨티나는 이때부터 포플리즘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오늘날까지도 아르헨티나 페론 정부를 거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 아르헨티나의 포플리즘은 , 국민 편가르기와 이를 통한 항상적인 민중의 정치 동원, 광장 정치가 페론주의의 최대 특징 중 하나입니다. 민중과 기득권층, 착취자와 피 착취자, 부자와 빈자, 반개혁의 기득권자와 젊은 개혁파로 편을 가르고, 노병의 기득권자는 지금까지 차지했던 자리를 이제는 개혁파들이 차지할 것이라며 페론주의 청년동맹이라는 것을 만들어 이들을 끊임없이 정치집회에 동원했고 지금까지도 동원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오월 광장이나, 오벨리스꼬 광장에는 거대한 에바초상화와 깃발이 등장하고 연극과도 같은 한밤중의 횃불 집회 속에서 그들은 그들만의 정치쇼를 보여주는 것이죠. 위협적인면서 대중적으로 보이기 위한 현정부의 간교한 술수라고 보여집니다. 그 가운데에서 그들은 자기들과 동참을 반대하는 세력은  민중의 적이라 간주하고 그들만의 힘과 단합을 끊임없이 과장하여 민중들에게 굴욕감과 증오심을 느끼게 하고 그렇게 정치적으로 유입시키려 하며, 반미 자주의 구호 아래에 외국인 소유 기업들을 국유화 했습니다. 

 현 아르헨티나 정부는 과거 페론시절의 포플리즘 정책을 판박이 했을 정도로 똑같은 상황입니다.  언론 통제, 사법부 통제 다양한 각종세금폭탄, 저소득층의 가족수당, 생계수당, 주택건설 계획, 노동자들 엄청난 혜택등 말로 표현 할수없을 정도의 퍼주기 정책을 하고 있습니다.  그로인한 자본과 인텔리들이 해외로 빠져나가고 노조 매수를 위해 국부가 탕진되면서 나라 전체가 거덜나게 된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아르헨티나정부는 자존심이 아니라 거만함을 볼수 있습니다. 아직도 페론이즘의 망령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반미 민족자주, 반자본주의 정책, 쇄국주의정책등을 보면서 이곳에 사는 저는 한숨만 나옵니다. 외국인인 저도 이렇게 느끼는데 내국인들은 오죽할까 하네요. 현정부는 좌파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마피아처럼 보여집니다. 

말하자면 현정부는 국민을 편가르기 하고 가진 자에 대한 갖지 못한 자의 분노와 증오를 권력의 기본 동력으로 삼으면서 사실은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를 모두 속이는 대국민 사기극을 연출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라살림 거덜낸 포플리즘 정책을 되풀이 하고 있는 아르헨티나...정말 블렉 코메디를 보고 있는 듯 합니다. 

아르헨티나의 문제점을 요약해 보자면 

첫째 : 공업화 정책대신 농업위주의 경제 정책을 편 것이 국익 발전에 도움이 안된것..
둘째 : 정치적인 불안, 끊임없는 내란과 혁명이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국력 낭비..
셋째 : 실패한 분배와 평등 중시한 페론주의 정책(퍼주기 정책) 을 계속 반복한 점.

제가 진단해보는 해결방법입니다. 

첫번째 : 반개혁의 정치

 정치가 특권과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대 지주, 군부, 독점기업, 거대 노조등 소수 엘리트에 의해 독점되면 안 된다. 국가 비젼과 전력을 가지고 시대변화를 읽고 개혁을 주도하는 정치가 꼭 필요하다. 국가 전략이나 비전이 없는 개혁은 의미 없다.

두번째 : 반 세계화 경제

 제조업과 수출산업을 경시하고, 대외시장을 막고, 외국자본을 제국주의라 규탄하고 심지어 주요산업을 국유화 하는 등 '자유화 세계화' 의 흐름에 역행하는 경제정책을 추진하면 안 된다. 개방과 경쟁이 없는 경제 세계화는 무의미 하고 발전이 없다.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경제정책을 펴나가야 한다.

세번째 : 복지 포플리즘

 반 개혁과 반세계화로 나라경제가 망가져 급증한 도산과 실업과 급속한 경기냉각 등 '퍼 주기 식' 복지 정책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된다. 잘못된 썪은 정치와 경제를 고치려 하지 않고 무조건 땜빵식의 무상교육, 무상의료등을 약속하여 노동자와 빈민들의 표을 구하면 안 된다. 그들이 필요한건 돈보다 국민 의식이 먼저인것이다. 실패한 포플리즘정책은 과감하게 접어야 한다. 또한 정치인들은 표를 의식한 실천하기 어려운 복지정책 공약은 하지말아야 한다.   
지금의 아르헨티나의 비극은 썩어빠진 정치인들과 안일하게 대처하는 국민의식과, 나만 잘살면 된다는 극단 이기주의의 합작품이라고 봅니다. 
한나라가 지도자를 잘못 뽑으면 나라꼴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보여주는 한 '예'입니다. 

아르헨티나 페론주의와 포플리즘에 관한 상징적인 교훈은 바로 과거의 부귀를 생산적인 것이 아닌 소비적으로 소진시켜 버렸거나...미래 세대에 부담을 주는 무리한 복지 정책의 확장 정책은 국부를 곤궁하게 만든다" 란 것입니다.
결국 선진국으로 진입하려는 원동력은 시민의식과 사회적 컨세서스에 달려 있다' 라 보는 것입니다. 

이해가 좀 되셨나요? 
그래도 절망속에서도 희망이 보이는 나라... 바로 아르헨티나가 아닐가 조심히 말해봅니다.

끝.

2012년 10월 16일 화요일

나의 이야기---그러려니....

누가 그랬다 "사람사는 것은 다 똑같다" 고..  어느 상황에 맞춰 끼는냐에 따라 맞는 말이기도 하나 또 어떨때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구절이기도 한것 같다.
우리는 어떤 사실에 대해 알고 있으면 그 사실이 품고 있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알고 있는 것과 그 일을 직접 겪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만 정답이고 바른말이고, 타인의 의견이나 지식은 무시하는 행동을 볼때면 참으로 갑갑하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우리는 아는 것이 많은 사람도, 직접적인 경험이 모자라면 왠지 모르게 부족함을 느끼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왠지 모르게 말이 곁 돌고, 진실성이 결여된 느낌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험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것> 이라 했던가?

살다보니 모두들 자기의 아픔만 아프다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 아픔처럼 직접적인 아픔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남의 아픔을 보면서 그 아픔을 이해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 아픔을 대신 아파해줄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아픔이 곪아 터져 상처가 덧나 내게 옮겨오지 않는 한 외면하거나 피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같은 아픔일지라도 처한 상황이 다르기에 어쩌면 아마 사람은 영원히 같은 경험을 할 기회를 얻지 못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해는 가급적이면 그사람의 입장에 서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코 나의 생각이나 나의 마음으로 다가가서는 그 사람의 곁에 설 수 없다.
어쩌면 남을 비난하거나 험담할 수 있는 것도, 그것에 대한 내 마음의 불편함이 믿음보다 더 강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사람이 사심 하나 없이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하고, 슬픔을 공유한다는 것은 쉽지 않는 일이다. 어쩌면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것이 더 현명할 때도 많다.

생각하기에 따라 '그러려니' 는 방관적이고 무책임한 행동이라 할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 '그러려니' 만큼 삶의 지혜가 묻어나는 말도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예전처럼 단순하게 도덕적인 것들이 삶의 기준이 되었을 때는 그렇게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처럼 급변하는 세상만큼이나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자신의 행동으로 인한 결과를 예견하기란 쉽지 않다. 물론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간섭으로 여겨질 행동은 조심하는 것이 좋지 않은가?

말로는, 마음으로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그 무엇을 못 하겠는가? 하지만 삶은 단절이 아닌 연연히 이어지는 것이기에 내게 필요한 것을 거침없이 내놓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해 요즘만큼 누군가에게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삼켜야 할 때도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뭐가 그리 마음에 걸리는 것이 많은지, 사람마다 그 속을 알 수가 없다. 사람들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데 어찌 먼저 선뜻 나서서 하고 싶다고 그 말을 쉽게 털어놓을 수 있겠는가? 

요즘 사람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 들으려고 한다. 그래서 찾아가 말을 건네는 사람이 도리어 더 민망해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소중한 사람, 친한 사람으로부터 외면당하거나 무시당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나섬을 절제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가 싫다고 마음에 안 든다고 불쑥불쑥 상대방이 싫어하는 말과 행동을 해서는 곤란하다. 사실 이러한 자각은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세상에 대한 경험이 쌓여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이러한 자각은 먼저 사람마다 각자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얼굴이나 모습만큼이나 생각이나 가치관이 다름을 인정할 수 있어야, 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다.
대화나 설득은, 상황에 대해 이해를 시키는 것이지 옳음을 주장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우리 자신에게 그리 손해가 가는 일이 아님에도 사람이싫으면 공연히 트집을 잡아 공격하려는 성향이 있다. 그러므로 때로는 '그러려니' 하는 마음이나 행동이, 오히려 불필요한 오해를 만들지 않는 현명한 삶의 지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2012년 10월 3일 수요일

나의 이야기---가난한 자의 변명

전화가 왔다..
몇일동안 연락이 없던 아는 동생한테 저녁에 잠깐 들리라는 전화다. 흔쾌히 "알았다"는 말은 했지만 내심 "왜 갑자기 나를 부르지?" 중요한 자리마다 참석을 안했던 녀석이라 '그러려니' 하고 지내왔는데 뜸금없이 얘기 좀 하잔다.
사실 그동생도 장남이고, 이제 무한경쟁사회를 알아가는 상황이라 예전에 내가 한참 방황하는 모습을 보는것 같다 내경험을 밑 삼아 얘기를 많이 해주는 편이다.
내가 이런식으로 살아보니 이건 아니고, 이렇게 해보니 괜찮더라 등...이런 저런 얘기들을 주저리 주저리 펼쳐 놓는다.. 그 다음에 행동하던지 아니면 계속 자기 고집을 부리면서 살던지는 그 동생의 몫일게다.
솔직히 나도 잘난것 하나없지만 내가 이제 것 겪어온 얘기들이 도움이 된다고 하니 기분은 좋다. 그런데 사실 나도 웃는게 웃는게 아니다.

나이가 들수록 내게 지워진 삶의 무게가 참으로 무겁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가난한자는 늘 우울하다. 아이들이 자라 쓸 곳이 많아지고, 젊었을때는 가지 않아도 좋을 상가나 결혼식에도 꼬박꼬박 찾아 경조금을 내야하고,특히 이민사회에서는  클럽모임이나, 아는 지인들과의 모임 등 각종 사회활동에도 명함을 내밀어야 대접을 받는 것이 현실이다 보니, 돈들어오기 무섭게 지갑에서 돈이 술술 새어나간다.
모아둔 돈의 잔액이 줄어들고 지갑이 얇아질수록 내마음도 같이 가난해 진다.

돌고 도는 것이 돈이라지만 과연 얼마만큼 벌어야 만족할 만큼 쓸 수 있을까?
남에게 아쉬운 소리 안하고 먹고 쓸만큼만 있으면 된다고 자위하지만 그것은 가난한 자, 희망이 없는 자의 변명일 뿐이다.
솔직히 나에게 돈이 풍족하면 부모님에게 용돈도 많이 드리고, 못사는 형제자매도 도와주고, 자선단체나 봉사단체에도 기부 한 번 폼나게 할 수 있을텐데...하지만 이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돈 있는자가 더 지독하게 인색하고, 더 많이 아는자가 그보다 못한 사람을 수탈하는 것이 인간들의 속성이 아닌가. 힘들게 돈을 번사람들일 수록 " 두고보자 내가 돈 벌면 복수해주마" 이런 생각을 마음속에 품고 사는것 같다..
지금 나에게 여유돈으로 10만불만 있으면 조금 빨리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될 텐데... 따지고 보면 얼마되지도 않은 돈인데, 꼬딱지만한 가게를 운영하는 나로서는 벌어서 생활비나 각종 세금들을 제하고, 근검절약하고 아낀다 해도 기반이 될 정도의 종자돈을 저축하기가 정말 쉽지않다..말이야 한방 터지면 된다고 하지만 그놈의 한방도 있는 사람들한테 터진다는 진리를 요즘 깨달고 있다. ㅡ.,ㅡ;;

고국이라면 주식투자나 펀드를 하고 싶지만 10여년을 악착스럽게 살아온 나의 삶을 혹여 실패하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위험성 있는 곳에 투자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개천에서 용났다>  란 말처럼 요즘에는 자수성가한 사람이 드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돈이 돈을 벌고 돈이 생길만한 정보를 선점하지 못함에 기인하기도 하나, 빈손으로 시작하여 결혼하고 내집 마련하고 아이들의 양육과 교육비, 특히 각종 세금폭탄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도 열심히 하면 된다, 지금 가진것에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고 하지만 출신에 따라 선착순이 정해지는 현실에서는 다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쓸 돈 다쓰고 어떻게 부자가 될 수 있겠는가? 라고 말을 할 수는 있다.
반대로 나는 이렇게 물어보고 싶다..그렇게 악착같이 먹을것 안먹고, 입을것 안입고 열심히 일만하면서 살아와서 이제 살만하니 병들고, 젊음이란 세월이 지나가 버리면? 너무 허무하지 않을까 생각도 든다. 너무 이상적인 생각일지 몰라도 인생이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일 것 이다. 그렇게 살면서 지나친 삶은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보상 받을려고 하는 내생각이 잘못된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려워도 돈이나 시간을 쪼개고 쪼개 써도 잘하니 못하니 하는것이 현실인데, 현실을 사는 사람으로서 최소한 인간의 도리나 문화생활정도는 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가난하다는 것은 남 보다 많은 것을 잃고 사는 것과 같다. 사람이 돈을 버는 이유는 단 한가지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가 아닐가 싶다. 돈으로 인해 친한 친구에게 가족에게 따돌림 받는 것처럼 사람을 안타깝게 하고 수치스럽게 하는 것은 없다.
친구는 저만치 앞서가는데 그 뒤만 쫒아야 하는 이류인생을 산다는 것은 무척이나 내 스스로에게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친구들과 소주 한 잔을 나누며 인생이 어떻니, 문학이 어떻니 하는 것은 다 젊었을 때 한번쯤 겪는 과정이고 넋두리이지만 나이가 차차 들면 그것만치 공허한 것도 없다.
<돈이 사람을 죽이고 살린다,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만 인생의 성패를 좌우한다.>란 말의 의미를 조금만 일찍 알았더라면 지금처럼 살지는 않았으리라.
젊었을 때 생각이 깨어있지 않으면 늙었을 때는 누울자리 하나 없을 나는 요즘 주변에서 보고 느끼고 있다.

지금 나는 과연 나를 알고 있는 다른사람에게서 어느 정도 의미를 간직한 사람일까?
어려운 일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은 되며, 부탁 한번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고는 있는 걸까?
이모든것이 정말 가난한 사람의 변명이라고만 말 할수 있는가?